[라한대] 기회가 찾아오는 모습 습작

문) 11
“들어보렴. 나는 언제나 괴로웠다……. 일, 일, 일, 그리고 텅 빈 집. 구제불능에 아무것도 없는 그런 사람이야.”
“저기요. 아저씨.”
“그래, 이제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가 됐구나. 내가 네 나이 땐 말이지.”
 
나 스물한 살.
대학교 이 학년.
지금 이러고 있다.
 
“발 치우라고요.”
 
목적은 그래,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든 돈이다.
돈.
돈돈! 좋은 어감이다. 어디에 있느냐?
내 발바닥 밑에 있다.
신발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애매한 압력. 한 마리 학이 비상하고 있는 오백원짜리 동전이 분명하다.
모든 면에서 졸렬해 보인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체면은 여유가 있는 사람이 차리는 거야.
 
“넌 내 발 밑에 동전이 있는 지 알 수 없어. 관측되지 않은 세계에서 실재의 증명여부는 오로지.”
“닥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정적.
달리는 버스 위에서 기사를 빼면 여고생과 나 단 둘이었다. 버스는 계속해서 흔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나는 곧고 올바르게, 떨리지 않는 말투로 말했다. 목소리는 결의로 불타고 있었다. 나이로 찍어 눌러서 존댓말을 받고 말겠다!
 
“음……. 그렇군요. 아저씨.”
 
복학생 이후부터 아저씨라고 불릴 자격을 손에 넣는 게 아니었나?
아직 군대도 안갔는데. 악의가 느껴진다.
 
“발 치워주세요 안 그러면.”
“데이트?”
“죽여버릴 겁니다.”
 
지옥의 데이트였다.
하지만 데이트 대상이 염라대왕이라도 지금 나는 절대 발을 옮기지 않을 거야.
 
대출을 받은 적이 있었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역시 불법 대부 업체. 이자가 장난 아니었다.
딱 오백원이 모자르다.
오백 원 때문에 수금하러 온 떡대도 참 우스운 꼴이지만 나는 더 웃긴 놈이다.
 
그 돈을 내지 못해서 지금 도망치고 있다.
 
미안하지만 고작 오백 원이다.
과자도 요즘 천원이 넘잖아. 좋은 곳에 기부하는 셈 친다고 넘어가 달라고.
남들이 길가다가 만원 짜리 지폐를 주울 때 나는 버스에서 누군가가 떨어뜨린 오백원 짜리 동전을 밟는다.
그래도 이는 미래의 천만금보다 지금 당장 더 소중한 동전이다.
 
여자애는 부루퉁한 표정이다. 입은 한 자는 튀어나온 채로 무시무시한 눈을 하고 이 쪽을 본다.
그래도 나는 겁 먹지 않는다! 절대 비키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했다.
떨어뜨렸으면 줍는 놈이 임자 아니겠냐?
여자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천천히 말을 한다.
 
“그럼 이렇게 해요.”
 
 
 
버스카드를 사지 않았다.
설마 환승 제도가 생길 줄은 몰랐다.
지금 내 옆에는 버스카드로 버스를 타면 50원을 할인해준다는 홍보물이 부착되어 있다.
그래 봤자 근처 편의점에 물어보니까 이 주 뒤에나 들어온다고 한다.
설마, 그 사이에 뭔 일이 벌어지겠어?
 
……벌어졌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는 길이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기 때문에 이천 사백원, 꼭꼭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천원짜리가 지폐였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집에 있던 동전통을 뒤져 꺼내온 거라 순도 100% 잔돈들이다.
그리고, 오백원이 그만 떨어져버렸다.
데굴데굴 굴러 남루한 아저씨한테 굴러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웃는 낯이었어. 발바닥이 자연스럽게 동전을 가리기 전까진 말이지.
하지만 모욕과 경멸의 시선에도 끄떡 안하고 버티는 걸 보면 상상 이상으로 얼굴을 대패로 밀어버린 게 분명하다. 나는 하나 제안을 했다.
 
“그럼 이렇게 해요.”
 
막무가내로 밀쳐내어 발을 치웠다.
바닥에는 역시나 오백 원 짜리 동전이 있다. 당황해서 달려드는 아저씨를 발로 걷어 찬 다음에 손바닥 위에 올렸다.
 
“지금부터 동전을 던질 겁니다.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는 거고, 뒷면이 나오면 당신이 이기는 거에요.”
 
내가 진다면 새벽, 가로등도 없는 길을 한 시간 넘게 두 발로 뛰어야 한다. 그건 생각 만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아저씨는 꽁돈 오백원을 얻게 되겠지.
시선이 모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승부라고 생각되자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졸렬한 두 눈이 나를 향한다. 엄지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이 때 동전은 어떤 위치에 떨어지게 될까?

①  던졌던 그 자리에 떨어지게 된다.
②  관성의 법칙에 따라 조금 뒤에 떨어지게 된다.
③  ………
 
 
“뭐 하고 있어요?”
“시험문제 만들고 있어.”
“아직도? 그나저나 빨리 설거지 안 해요? 분명히 한다고 했었잖아요.”
 
그 때의 여고생은 이제 완연한 숙녀가 되었다. 앞치마를 두른 채 눈을 치켜뜨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괜히 행복해졌다.

[팬픽] 공주와 역신 습작

배경상황: 세군과의 데이트를 건 한판 승부(7권)




“6번이 백세군의 무릎 위에 앉습니다.”

서비연의 목소리에 다들 6번이 누구지? 하며 웅성거렸다. 잠시 후 이람이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 손을 들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람은 주저했다. 그녀에게 사람의 몸에 닿는 다는 건 다른 소녀들과는 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인 것이다. 생각이 남김없이 파고들어 점액처럼 파고든다. 악의는 마치 독과 같이 스며든다. 굴욕이다, 라고 이람은 생각했다.

“기권할겁니까, 이람? 저는 상관없습니다만.”

퉁명스러운 돈가스의 목소리에 이람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앉지 않으면 탈락입니다.”

머뭇거리며 이람이 망설였다.
휴우, 이게 다 바보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개의 대소변을 관리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올바른 상대를 만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 또한 주인의 의무.
이람은 깜깜한 밤을 걷는 듯한 불안한 손짓으로 조심조심 백세군의 무릎을 조금 매만졌다. 백세군이 뭐라고 하려 했지만 눈을 꾹 감고 털푸덕 주저앉았다. 그래도 백세군이라서 다행이다. 아직도 기억한다. 그 선명하고 밝았던 선한 빛. 이람이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던 소년의 물색 마음-.

‘이람의 몸!이람의 몸!이람의 몸!이람의 몸!이람의 몸! 말랑말랑해! 따뜻해! 부드러워서 사랑스러워! 조금만 더, 가까이! 목덜미에 땀이 핥고 싶다! 이렇게 혓바닥을 내밀어서 살짝, 배도 분명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냄새! 냄새가 난다! 달고, 향기롭고 좋은 냄새가 나!!’

은 굉장히 끈적끈적한 물색이었다.

“히이이이이이이이이익!”

이람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지만 마음은 전혀 진정되지 않아서 마구 소리 질렀다.

“우와아아아아! 우아아아아아앗! 으아아아앗!”

그 와중에 이람은 보고 말았다. 평소라면 이람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짧은 순간, 백세군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이람은 보고 말았다!
‘이건 추행이다! 확신범이다!’
소년은 소녀가 마음을 읽을 수 있음을 알고 있을 거다. 알면서 노골적으로 생각하는 건 바바리맨과 다를 바가 없다.
눈이 팽글팽글 돈다. 어째서? 의문의 답을 내놓지 못한 채 당황해 눈을 깜박여 보지만 그건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보기 드물게 완전히 당황해, 정숙하지 못한 비명을 지르던 이람의 마음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 있었다.
봉황여의명룡공주.
그것은 자신의 이름이며 평생을 지고가야 할 숙명이며, 자신이 살아갈 방식을 말하는 것이었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빳빳하게 세운 채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인간은 더럽다!
추하다! 자기밖에 모른다!
많이 많이 봐 왔다! 그러니까 이런 거, 익숙하다!
털을 세우듯 이람이 자신에게 소리쳐 마음을 고양시키며 정신없이 혼란해 하는 사이 게임의 다음 순의 제비가 돌았다. 공주는 돈가스였다.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모든 번호가, 가슴을, 흠, 벗지 말입니다.”
꺄아아아아아.
이람은 만약 들었다면 누구나 사랑스러웠다고 말할 만한 비명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속으로 마구 소리쳤다.

돈가스는 원래 ‘모든 번호가 옷을 전부 벗는다.’를 말할 생각이었다. 명령하는 자 본인에게 적용되지 않는 공주님게임. 그렇다면 이 카드는 필승. 회심의 한 방이겠지. 게임의 필승구조는 파악한지 오래다. 이런 종류는 그녀에게 자신있는 부류에 속했다. 백세군 근처에서 위성처럼 맴도는 여자애들은 전부 나름대로 백세군에게 호감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것이 개인의 수치까지 감당할 정도라고 묻는 다면……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훌러덩 옷을 과감하게 벗을 정도의 사람은 없다.
‘아니, 한 명 있지 말입니다.’
유월린. 백세군의 약혼녀라고 했던가. 그녀라면 의외로 간단하게 벗고, 백세군은 별 생각 없이 넘어갈 공산이 크다.
하지만 그녀를 제하더라도 특히 이람이라든가 하는 솔직하지 못한 소녀들에겐 비장의 한 발이 될 것이다. 자신이 공주를 뽑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까지 그대로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공주를 뽑자마자 눈에 들어온 부끄러움에 못이겨 오히려 당당해진 이람의 반응을 보니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이런 명령이 떨어지면 이람은 반드시 기권한다.
그 사실은 돈가스의 마음에 살고 있는 가학심이 충족되지 않는다. 좀 더, 수치에 떨며 고통스러워하는 비명소리를 듣고 싶다!
고귀한 계급의 새된 비명.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아니었던 자들이 갈망하는 가장 보편적인 욕망이었지 않은가.
그녀에게 내장된 전투 로봇의 본능. 상황을 비명을 유발하는 형태로 움직이고 싶어하는 사고 코드는 복잡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최초 제작 시에 만들어졌던 전투에 관련된 사고 코드는 깊게 파묻혀 이젠 무의식의 영역이 되었다. 하지만 돈가스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모든 번호가.”

돈가스는 머리를 굴렸다. 마침 돈가스의 눈에 임요희가 눈에 들어왔다. 임요희는 돈가스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크흠, 가슴을, 흠, 흐음, 벗지 말입니다.”
“가슴을 벗는 거야?”

밀려드는 경악 속에서 이로만이 침울하게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가슴은 벗을 수 없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이람이 당황했다. 이미 아까 전부터 당황 이외는 하지 못했다.

“정도가 있다! 법도가 있다! 이목이 있는 이런 곳에서, 가, 가, 가슴이라니!”

파닥파닥 손을 부채처럼 흔들었다.

“이람은 더운 거야? 그럼 속옷보단 겉옷을 벗는 게 더 시원한 거야.”

천연덕스러운 이로의 말을 무시한다. 의외로 가장 먼저 브래지어를 풀어헤친 건 서비연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돈가스의 눈 앞에서 서비연이 당당하게 선포했다.

“뭐라고 하셔도 저는……이 승부만큼은 이기고 싶습니다.”

식솔을 베고 전장으로 나가는 장군의 기백이 느껴졌다.

“저는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만난 적은 쓰러뜨린다! 쓰러뜨렸으면 목을 떨어뜨린다! 패배를 시인하게 만들어 퇴장시킨다! 절대로 다시 오지 못하도록 한다!”

좋은 느낌으로 파탄하고 있었다.
그보다 이제 포기하면 비겁자가 되는 상황까지 왔다.
서비연, 이런 쪽으로 소질이 있었어? 이람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벗으라면 벗겠어요.”
“벗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화끈하게 다 벗는 게 좋지 않을까?”

입술을 앙다문채 결연하게 주먹을 쥐는 서비연.
스스로 말하는 자신도 민망했지만
이람은 드물게 백세군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본인이 의식하지 못했지만 눈물방울이 아롱아롱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백세군이 말했다.

“하하하하하하!”

아니 웃었다.
진짜 큰 목소리로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이람과 마주보며 서는 형태가 된다.
그 모습에 드물게 이람이 조금 뒷걸음질쳤다.
서늘한 눈동자. 거만한 몸짓은 이때까지 봐 왔던 소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내 정체는 알고 있겠지.”
“알아.”
“그렇다. 나는 신이다.”
“어라? 뭔가 빠진 듯.”
“수많은 흰색 경험이 나를 성장시켰다. 나의 식료는 질투와 사랑이다.”

이람도 눈을 돌리지 않는다. 백세군은 지금, 정상이 아니다.
백세군이 광대처럼 손을 크게 흔들며 손으로 소녀들을 가리킨다. 옷이 허물을 벗듯 훌렁훌렁 벗겨져, 조선 시대였다면 까무러칠 정도로 새하얀 피부가 잔뜩.

“하얀 세계의 왕!”
“어어어? 그런 의미였어?”

솔직히 처음 봤을 땐 꽤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 이람이 볼을 두 손으로 감싸 보았지만 소용없다.
이렇게 분위기가 달아오른 이상 선택은 두 가지 뿐이었다.
분위기를 편승하느냐, 아니면 하차하느냐.

그제야 이람은 눈치챘다. 희미한 알코올 냄새. 바닥에 굴러다니는 병. 주스라면서 위예시가 들여온 음료수였다.
병을 들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수, 술? 지금 무슨 짓을 한 게냐! 학생이란 말이다!”
“안 그러면 봐주지 않아. 세군은 술이 들어가면 솔직해 지니까……그래서 마인드 컨트롤이 해제된 것과 유사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너…….”

말을 잃은 이람을 무시하고 위예시가 저벅저벅 걸어 백세군의 앞에 섰다. 고개를 살짝 숙여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귀는 터질듯했다.

“세, 세군! 나, 나는. 오래전부터.”

소녀의 말에 담긴 무게는 년 단위.
하지만 소년이 아닌 역신은 눈치채지 못한다.

“시끄럽다, 흰머리.”
“희, 흰머리? 그래도 좋아.”

왁자지껄한 테이블, 그 너머 깊은 어둠 속.
수많은 여자애들에게 둘러쌓인 남자애를 보면서 옆구리가 오랫동안 시려왔던 지배인이 소리 죽인 채 울고 있었다.


~完~

* * *

팬픽에 적혀있는 내용은 제가 개와 공주를 탐독하면서 멋대로 더한 설정입니다.
캐릭터들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성격이 되어 혼란스럽더라도 아, 이녀석은 개와 공주를 이런 느낌으로 읽고 있었군- 하고 관대하게 넘어가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엽편] 신의 능력 습작

초인.
이능력.
그렇다. 나는 초인이다. 인간이 아닌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나는 신이다.
지금은 아주 중요하다.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려 있다.

 

“네가 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시간도 넉넉해. 그렇다면 가장 잘 하는 사람이 하는 게 옳아.”

 

시끄러워.
그 입 좀 닥쳐.
수다스러운 여자의 입을 후려친다. 피를 뿌리며 여자는 나가떨어졌다. 지금 나는 지구를 구하는 영웅님이다. 나의 집중력은 천금에 달하는 가치가 있다.
표적은 100미터 정도.
저것이 코어다. 모든 악당들은 저기서 에너지를 얻고 있다. 저것만 부수면 모든 것이 마법처럼 돌아오게 될 거야.
떨림은 거짓말처럼 멎어 있었다. 나는 이상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모두가 집중하고 있다. 이것으로 악은 종말을 맞고 모든 것은 바뀌게 되겠지.
신중하게 호흡을 참고 표적을 노려보았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센다. 손에 들려 있는 건 현대에 강림한 성녀가 축복하고 별의 대장장이가 담금질한 총알. 단 한 발.
이것을 장전해 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너무나도 간단하다.
손가락을 트리거에 건다. 고민할 필요가 있나? 그냥 당겼다.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인류에게 가장 소중한 소리였다. 수 없이 괴롭힘당한 세계에서 마련한 단 한 가지 반격. 수많은 결사대가 피를 뿌리며 만들어낸 기회.

 

그리고, 표적은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코어는 멀쩡하게 제 할 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
잠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깐, 이거 뭐냐? 야 뭐냐고?”
“잘 할 수 있다며? 이거 누가 데려왔는데? 전투에도 도움도 안 되고 개같이 고생만 시키고.”
“잠깐, 싸우지 마……. 여기서 싸우면 끝장이야. 조금 냉정하게 모두 생각해보자.”
“미친. 야 우리 다 뒤진거야. 끝났다고 씨바.”

 

이해할 수 없다.

 

“이봐.”
“어? 잠깐만, 뭐?”

 

눈앞을 그림자가 메웠다. 그것이 주먹이라고 인식하자마자 땅을 구르고 있었다.
나는 병든 말처럼 헐떡였다.

 

“후, 됐다. 이왕 실패한 거 용사답게 죽자.”

 

되긴 뭐가 돼? 날 후려쳐놓고 멋대로 누가 누굴 용서해? 버러지같은 근육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하는거야?
총알이, 빗나갔어?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상황은 잘못 되었다. 나는 우수하다.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의무가 있다. 그렇다. 의무다. 권리, 권유, 가능성같은 불확실한 무언가가 아니라 명백한 진실이다.
세계는 나의 실험실이다.
내가 하는 행동은 모두 실험의 연장이며 실패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빗나간다면 가서 부수면 되잖아. 왜 여기서 그래?”
“코어와 우리 일행의 사이에 지날 수 없는 방어벽이 있으니까! 그 총알만이! 방어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우리의 유일한 공격 수단이었으니까!”
“용사가 그거밖에 못해? 그러고도 감히 용사를 자칭해?”
“너……!”

 

경보 소리.
악당들에 의해 위치가 발각되었다. 순식간에 주변은 인기척으로 들끓었다.
남자는 얼굴에 묻은 피를 그대로 닦지도 않는다.
검은 녹슬어 있다. 모습은 마치 중세의 성검과 같다. 하지만 모양만 그럴 뿐 저것은 이미 닿는 적을 모조리 분쇄하는 현대 과학의 집대성이다.
그래도, 피를 뿌리고 있다.
동료들이 죽는다. 나를 후려쳤던 남자의 목이 잘려 땅바닥을 뒹굴었다. 눈은 부릅뜬 채 짓밟혀 형체를 잃었다.
주변은 비웃음으로 가득찼다. 죽음은 온전히 우리들만의 것이었다.
여자만이 서 있다. 나를 보고서, 등 뒤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악당들은 신경쓰지도 않는다.
여자가 말을 한다.
첫 마디는 뜬금없었다.

 

“어째서.”

 

이유를 묻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여자 주변만은 평화로운 목초지같았다. 짧은 시간이었다.

 

“어째서 너는 변하지 않는거야?”
“변한다니?”

 

나는 무수히 변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해 여기까지 왔다. 수많은 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나의 혜안으로 위기를 타파했다. 어리석은 파티원들을 잘 이용해서 슬기롭게 위기를 헤쳐 기회로 만들었다.
그런데?

 

“너는 내일도 그런 얼굴로 웃고,
그런 생각을 하며,
또 다시 한심하게,
여전히 바뀌는 일 없이,
어제와 똑같이,
지쳤어.
나는 이제 포기해버렸어.“

“지금 포기해도 이미 늦었잖아?”
“그렇겠지. 희망이 있었어. 나한텐 어떤 사람이라도 변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어. 아닌가봐, 그거.”

 

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건 새로운 패턴이었다. 로봇처럼 감정 없는 말을 하던 여자가 이러는 건 신선했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는 그저 이 주일 정도 같이 여행한 용사파티였을 뿐이다.
지금 이 세계에서 너와 나의 만남은 고작 14일이다.
그런 식으로 말해봐야 없는 건 없는 거다. 오랜 시간 아는 척 해서 뭐 어쩌려고?
전지한 나라면 몰라도 패턴을 벗어난 말투는 짜증나는 일이었다.

 

여자는 슬프게 웃는다.
역시, 라고 혼잣말을 한다.
나는 그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있을 수 없다. 나는 신이다. 나는 모든 것을 조율한다. 이 상황이야말로 위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조연을 죽이고 극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현명한 나의 순간적인 판단임이 분명하다.
무의식이 만들어낸, 내가 반드시 활약할 수 있는 장면.
솟아나야 한다. 위기를 타파할 극적인 힘이, 혹은 뭔가 긍정적인 기적이. 여태까지 그래왔다. 어떤 위험이 생기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기적이 일어나 위기를 상쇄했다.
지금도 그러할 터이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살아있으니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거야.”

 

그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편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 상황은 절대적으로 안 된다. 그렇게 납득했다. 하지만 괜찮다.
왜냐면 루프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최후는 몇 번이나 경험했다.
기억하고 있다. 처음엔 꼴사납게 덜덜 떨면서 살해당했다. 하지만 나의 대응은 점점 다채롭고 긍정적으로 변했다.
실패가 거듭되었다.
하지만 다음 번에는 확실하다.
몇 번이나 해봤으니까 이제 반드시 성공한다.
슬슬 성공할 때도 되었다. 그럴듯한 예감이 든다.
여자는 말했다.

 

“우리에게 해피엔딩은 없어.”

 

그것을 끝으로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너까짓 게 함부로 말하지 마.
어차피 루프되면 다시 살아나잖아? 지금 죽는 건 연출이라고 생각하라구. 이 세상은 어차피 내가 죽지 않으면 무한히 살아나는 인형놀이니까.
그러니까 이 실패는 아무것도 아냐.
다시,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은 절대 처하지 않으리라.
무능력자라 여겨졌던 내게 루프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겠지.
너희들은 계속 나를 무능하다고 비웃으면 돼. 하지만 나의 이, 신의 능력으로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된다면 계속 입을 털 수 있을까?

 

……이상하게도, 여자의 얼굴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가슴 속에선 스멀스멀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애써 삼켰다.
나는 무능력자가 아니다.
이 루프 능력은 나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신이다.
시간을 벗어난 이 시대 최고의 자유인이다.
나야 말로,
나니까 이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능력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주변에선 소음이 들려왔다. 피가 튀고 살점이 잘근잘근 잘려나갔다.
루프가 시작될 것이다.
루프가 시작되는 게 분명하다.
루프가 시작됨이 마땅하다.
루프가,
시작되어야,
했다.







사이퍼즈 노벨 1 사이퍼즈 노벨

이 소설은 마음대로 게시판 호워프님의 ‘롤노벨’ 팬픽입니다.





PC방에서 무료해진 민규는 하품을 했다.


“수능도 끝났겠다, 미친 듯이 할 게임 없나?”


대박은 아니지만 노력한 만큼은 나왔다. 하지만 수능이 며칠 지난 지금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몇 년간 자신을 억누르던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부모님도 고생했다며 용돈을 빵빵하게 주시는 이 때 즐겨보지 못하면 언제 또 놀아본단 말인가.


“나랑 사이퍼즈 할래?”


선하의 말에 민규는 고개를 돌려 다시 컴퓨터를 보았다.


“사이퍼즈?”


“응.”


“아 그 저번에 초능력자들끼리 싸운다고 홍보했던 그건가? RPG였던가?”


“아니야. AOS야.”


비웃음만 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RPG가 아니었나? 옛날 민규는 던전 앤 파이터를 하면서 수많은 해커들의 해킹 시도와 피말리는 전쟁을 치러왔고 결국 패배해서 알거지가 되었다. 복구하면 들어줄 테지만 정나미가 확 떨어져버린 터라 그 이후로 온라인 RPG는 안 하리라 맹세하고 수능에 매진했던 것이다.


“AOS? 카오스 같은 건가?”


“일단 말로 설명하긴 귀찮으니까 몇 판 해 봐. 넥슨 채널링도 되니까 회원 가입을 따로 할 필요도 없을 거야.”


선하가 능숙하게 사이퍼즈 공식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화려한 일러스트와 불꽃을 움켜진 채 허세를 떨고 있는 마녀가 보인다. 민규는 손쉽게 넥슨 채널링에 동의한 뒤 게임을 실행했다. 닉네임을 정하라는 팝업창이 표시되었다.

민규는 씨익 웃으면서 자신있게 닉네임을 입력한다.


‘시작되는 신화.’


어떤 게임을 하든 간에 민규의 아이디는 이것으로 통일이었다. 선하가 힐끔 모니터를 살펴본 뒤 피식 웃었다. 민규는 자랑스러운 훈장에 흠집이라도 난 것처럼 벌컥 성을 냈다.


“야! 넌 닉네임이 어떻게 되길래 사람 닉네임을 보고 웃냐?”


‘미소공주’


“푸, 푸하하하! 공주래 공주!”


뺨다구가 돌아갈 정도로 강력한 일격을 맞았지만 민규는 신경쓰지 않았다. 닉네임이란 사실 누구나 조금 부끄러운 것.

로딩이 끝나고 1급으로 표시된 민규의 분신이 마을 같은 곳에 툭 떨어져 있다.


“넌 몇 급 인데?”


“22급.”


“높은 거야?”


“중수 정도지.”


이상하게 자부심에 가득 찬 모습을 보면서 그러려니 했다. 아마 이 녀석도 초보나 다름 없을 게 확실하다.


“일단 제일 처음 하면 튜토리얼이 나올 거야. 꼭 해. ‘남자라면 실전이지!’ 이 따위 소리 나불거리면 죽을 줄 알아.”


“나, 냐암. 네, 넵. 그럼요.”


괜히 친구가 아니다. 이미 남……까지 말했다가 급속도로 회전. 생명을 지키는 길을 선택한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었다. 캐릭터 일러스트가 잔뜩 뜬 선택창이 올라와 잠시 고민하였다. 여자 캐릭터도 많고 남자 캐릭터도 많다.


“사이퍼즈의 캐릭터는 22명이 있어. 게임 시작 전 자유 연습장에서 구매한 캐릭터들을 할 수 있으니까 일단 아무거나 해 봐.”


“이거 캐릭터들을 현금으로 사는거야?”


“아니. 게임 돈 ‘달러’로 사는 거야. 단 캐릭터를 사기 위해선 일정 급수가 필요해. 지금은 기본 캐릭 8명이 있을거야. 일단 이 중에 하나 골라봐. 기본 캐릭이라고 해도 나중에 나오는 캐릭보다 강하고 특색있는 애들도 많으니까.”


민규는 신중하게 생각한다. 어차피 게임 돈으로 구매 가능한 캐릭터라면 유저들이 사기캐릭이 나올때마다 밸런스로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본 캐릭들도 가장 처음에 제공된다는 걸 제외하면 다들 괜찮은 녀석들이라는 것. 하나 하나의 일러스트를 유심히 살펴보던 민규는 캐릭터 하나를 정했다.


“로라스? 초보자가 하기에도 괜찮지. 고수가 하기에도 좋은 폭넓은 캐릭터야.”


“그럼. 난 처음 봐도 딱 이런 캐릭만 고른다구.”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센스가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 민규의 기분이 고양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선하는 민규가 어떤 캐릭을 고르든 간에 칭찬을 해 줄 생각이었다.


‘일단 재미 붙이면 못 빠져 나올테니까. 안 그래도 혼자하기 심심했는데 얘나 잘 키워서 파티하고 다녀야겠다.’


물론 이런 생각을 민규가 알리는 없다.

튜토리얼이 시작되었다. 작은 원숭이같은 몬스터 4마리가 등장해 로라스가 사용하는 스킬의 샌드백을 해 준다.

선하가 말했다.


“스킬은 키보드와 마우스를 누르면 발동 돼. 대부분의 캐릭터의 기술은 R기술(마우스 오른쪽 클릭), LR기술(마우스 양쪽 클릭), SL기술(Shift+마우스 왼쪽클릭)이 있고 마우스 왼쪽 클릭만 하면 캐릭터의 기본 평타가 나가게 돼. f는 잡기 기술로 적군이나 철거반, 립을 잡았을 시에 잠시 무적 시간이 존재하고 약한 데미지를 주는 기술이지. E는 궁극기고. 한 번 써 보면 알거야.”


민규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로라스 캐릭터의 스테이터스를 확인한다.



검룡 로라스


소속: 헬리오스

직업: 스페인 왕실 호위대

코드명 : FAITH

본명: 알베르토 로라스

국적: 스페인

신장: 185cm

체중: 69kg


근거리 ★★☆ 원거리 ★ 대인 ★★☆ 공성 ★★ 조작성 <보통> 기동성 ★


특수 능력: 강력한 순간 각력 마상창을 가볍게 다루는 기술. 전투상황에서 지칠 줄 모르는 정신력과 의지. 그의 명예심과 정의로움은 이롭기도하고 해롭기도 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용창 2식

전방을 향해 창을 최대 두 번 찌르는 기본기술입니다.


투창 1식

창을 던져 멀리 있는 적을 공격하며, 누워 있는 적도 공격이 가능합니다. 전방 이동 키를 연이어 두 번 입력하면서 스킬을 사용하면 더 강한 창이 멀리까지 발사되며, 맞은 적을 다운시킵니다.


용창 22식 나선창

강력한 찌르기로 적을 쓰러뜨립니다. 최대 세 번까지 다단히트 되며 사정거리가 깁니다.


검룡의 심판

전진하며 적을 창으로 찍어버립니다. 누워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검룡 떨어뜨리기

적을 잡고 하늘로 뛰어올랐다가 찍어 내리는 기술입니다. 기술이 끝날 때까지는 무적입니다.


용창 16식 기상창

자신이 누워 있는 상태일 때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술 사용 즉시 일어나며 주변의 적을 공격합니다. 단, 기상 무적시간이 짧아서 자칫 추가 공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용창 17식 예의 표하기

일정시간 동안 공격력과 방어력을 조금 증가시키는 효과가 발생합니다.


용창 비전식 용성락

하늘 높이 솟아오른 뒤 마우스 좌클릭을 하면 목표지점을 향해 찍어 내립니다. 공중에 올라갔을 때에는 시야가 확대되어 매우 먼 거리까지 볼 수 있게 됩니다. 단, 이렇게 넓어진 시야는 팀원과 공유되지 않습니다. 공격 발동 시 원거리 공격에 대해서 슈퍼아머가 되며 범위가 넓고 공격력이 매우 높은 일격필살의 기술입니다.




“뭔가 복잡하고 어려워 보인다.”


“별 거 아냐. 사이퍼즈는 스킬도 적고 공통 직업군마다 공유하는 스킬이 있어서 금방 다 외울 수 있을 거야.”


“AOS라면 일단 본진 건물 이거 부수면 끝나는거야?”


“맞아. 라인은 5줄이지만 중간 타워가 있고 철거반이 다니는 라인은 1, 3, 5라인이고 2, 4번은 샛길이라서 철거반이 다니지 않아.”


“철거반이라면 이 작은 아저씨들 말하는거야?”


“그래. 주기적으로 본진에서 생성되서 적군 본진 건물, 그러니까 HQ에 돌격해. 서로 싸우다가 가끔 사이퍼(유저)를 때리기도 하고, 길막도 하지. 2, 4번 라인은 철거반이 없어. 철거반은 아군과 시야를 공유하기 때문에 움직이는 워드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이 철거반을 얼마나 적군 쪽으로 보내느냐가 중요하지. 아군의 시야가 늘어나는 셈이니까.”


“그럼 2, 4번 라인은 왜 있는거야?”


“그 대신 립이 있지. 일정 간격으로 립이 생겨. 이 립은 코인이랑 똑같아. 잡기 쉽고 잡으면 코인을 주지. 이 립의 위치도 미니맵에서 적군과 공유돼.”


민규에게도 AOS의 지식은 있었다. 중간 타워를 부수고 본진 건물을 부수면 이긴다. 본진 건물……그러니까 HQ라고 했던가? 거기에서 철거반이라는 몹이 나와 시야를 밝히고 서로 싸운다. 사이퍼들은 이 근처에서 상대방을 견제하거나 싸운다. 이 정도여서 선하의 설명은 뭔가 머리 아픈 이야기였다. 세세한 이야기들은 점점 익숙해지면 쉽게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일단 튜토리얼대로 진행해 봐. 간이 공성전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으니까


”알았어.“


선하를 믿고 일단 민규는 튜토리얼을 순조롭게 진행했다. 상단 박스가 지시하는 대로 각종 스킬을 써 죄 없는 립들의 머리를 쪼개고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인 상자를 파괴했다. 투창으로 어린 수호자를 쓰러뜨리고 나선창으로 적군 HQ를 혼자서 파괴하고 아무도 없는 튜토리얼 공간 안에서 승리를 만끽했다. 선하는 마치 사칙연산을 풀어 기뻐하고 있는 친척동생을 보는 누나의 눈으로 따스하게 지켜보고 있다.

짧은 튜토리얼이 끝나자 선하가 말했다.


“자, 그럼 게임을 시작하자.”


공성전에 입장하자마자 금방 매칭이 완료되었다. 캐릭터 선택창이 뜬다.


“일단 로라스를 고를까?”


“아냐. 랜덤을 해.”


“왜? 아까 튜토리얼 때 로라스 했잖아? 난 다른 캐릭 스킬도 모른다고.”


“어차피 스킬설명은 F1누르면 다 떠. 일단 랜덤을 하는 이유는 첫 번째, 네게 맞는 캐릭터를 찾기 위해서. 두 번째, 코인량 때문이야.”


“코인? 그게 뭔데?”


“하? 너 튜토리얼 끝냈잖아? 아이템도 샀으면서? 코인은 경험치면서 돈이야. 이 코인은 적군 건물을 파괴하거나 적군을 킬 하거나 어시스트를 먹을 때 들어오는데 이걸로 첼시 워터, 패스트러너, 공격력 강화 물약, 방어력 강화 물약 등의 소모품도 구입할 수 있고 동시에 장비 아이템도 구입할 수 있다고.”


로딩이 진행중이라 선하의 말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아 레벨이 그거였어?”


“그래! 카오스같이 아이템을 조합하거나 그런 복잡한 방법 없이 캐릭터 세팅란에서 네가 세팅한 아이템을 코인이라는 만능화폐로 구입하면 아이템의 성능에 따라 동시에 레벨이 오르는 시스템이야. AOS의 진입장벽을 확 낮춘 아주 획기적인 시스템이라구!”


“그렇구나. 좀 신기하긴 하네. 경험치랑 돈이 합쳐져 있다니.”


멍청하게 감탄만 하면서 로딩 화면을 보았다. 적군의 아이디가 출력되었다.


-적군


ㅡ검룡 로라스

ㅡ불의마녀 타라

ㅡ결정의 루이스

ㅡ파괴왕 휴톤

ㅡ강각의 레나


다들 레어 아이디인데?

게임이 시작되고 점프기어가 나타났다. 강인해 보이는 로라스의 시점으로 컴퓨터 모니터가 꽉 차기 시작한다. 사이퍼즈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민규는 긴장감에 목 안이 바싹 말라왔다.





[단편] 교통카드전쟁 습작

소녀들의 전쟁/

“너희들 심심하지 않니?”

 

이주나가 손가락으로 카드를 돌리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전서인과 김현지는 멀뚱멀뚱하게 주나를 쳐다보았다.

 

“내 생각인데 이대로 있다간 모처럼 만든 몸이 무뎌지고 말 거야.”

 

이주나는 체육특기생이었다. 선천적으로 운동을 좋아하는 그녀가 꺼낼 말이란 뻔한 것이었다. 김현지가 고개를 흔들었다.

 

“체력 싸움이면 난 빠질래. 어차피 이 셋 중에 널 이길 사람은 없으니까 말야.”

 

김현지가 자신 있는 건 공부였다. 의자에 앉았을 때 세 명 중에서 그녀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서인은 말없이 동의했다. 같이 놀기 피곤한 아이들이었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자체가 공정한 내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 전서인만이 특출난 부분이 없었다. 그러니까 항상 놀이제안엔 침묵했고 항상 꼴등은 그녀의 차지였다.

이주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황금 같은 방학을 떠나보낼 거야? 하다못해 남자친구도 없는 것들이.”

“사돈 남 말 하시네. 체육이랑 결혼해라.”

 

카페에서 커피를 빨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학기 중엔 방학 때 신나게 수다 떨자! 하며 꺅꺅 거렸지만 실제로 방학이 되니 넘쳐나는 게 시간이었다. 화젯거리도 떨어졌고 친구 관계도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 이벤트가 없으면 심심함에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때, 멍하니 창 밖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보고 있던 이주나가 갑자기 말을 꺼낸 것이다. 일단 남은 두 사람은 의견을 들어보기로 결정하였다.

이주나는 어깨에 힘을 준 채로 가슴을 쭉 폈다.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버스는 3대. 안락하고 편안하면서 제일 빠른 고속버스, 불편하지만 빠르게 가고 비싼 좌석 버스, 느리지만 값이 싸고 배차간격이 가장 짧은 일반버스. 이 세 종류가 있지?”

 

끄덕끄덕.

 

“버스 카드로 했을 때 일반 버스 900원, 좌석 1200원, 택시의 기본 요금 2500원. 그러니까 버스가 가장 싸지?”

 

그래그래.

 

“내게 티켓이 있단 말씀이야. 어제 매진임박 때 간신히 구한 귀중하고도 귀요미한 콘서트 티켓. 콘서트홀은 다 알고 있지? 차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그거. 어때? 누가 더 빨리 이 콘서트홀에 도착하느냐 내기하는 건?”

“잠깐, 네가 콘서트 티켓을 가지고 있다면 의미가 없잖아? 네가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리 빨리 와도 콘서트를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런 말은 이미 예상했어. 나는 콘서트홀 앞 물품보관함에 티켓을 넣어뒀지. 비밀번호 8684니까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유리해.”

 

소녀들의 화제에서 콘서트라고 한다면 아이돌 오빠의 콘서트, 그 이외일 리는 없었다.

 

“좋아, 콜. 난 이 전자 사전을 걸겠어.”

 

김현지는 망설임없이 평소에 애지중지하던 전자사전을 걸었다. 없어진다면 집에 가서 불이 나도록 볼기를 얻어맞을 게 뻔하지만 오빠의 콘서트라면 더한 것도 포기할 수 있었다.

 

“서인아, 넌?”

“그러게……뭘 걸지?”

 

전서인에겐 마땅히 소중하다거나 귀한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콘서트 티켓은 꼭 가지고 싶었다.

 

“귀중한 걸 걸면 돼!”

“그래도 될까? 그럼……나는 너희들과의 우정을 걸겠어.”

“그건 안 돼!”

 

여차저차해서 소원 들어주기 10회로 타협하였다. 세 명은 각자 테이블 위에 손을 겹쳤다. 그 위에는 이천 원이 충전된 교통 카드가 세 장. 이 카드에 충전된 돈 이외에 따로 자신의 돈을 사용한다면 자신의 실격패가 된다.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전쟁을 하자!”

 

말 그대로 소녀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주나/

이주나에겐 자신이 있었다.

지능을 요하는 심리 게임인 척 했지만 사실 그것이 함정이었다. 게임의 제안자라면 흑심이 있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어야지……! 김현지, 똑똑한 척 했지만 영 맹물이구나!

왜 버스를 타야한단 말인가? 사람에겐 두 다리가 주어져 있지 않은가?

 

버스를 타 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버스는 자동차처럼 지름길을 달리지 않는다. 일정한 노선이 있고 각각 정류장마다 도착해야하는 시간이 있다. 각 정류장의 거리는 약 5분 정도. 즉 5분마다 버스는 정류장에 멈춘 채로 손님을 받거나, 손님을 내보내야 한 다는 것.

이 말은 사람이 달려서 충분히 쫓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 아니야.”

 

이주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여기서 선언한다. 버스는 사람보다 느리다!

 

멍하니 있다가 놓친 버스를 다음 정류장에서 따라잡은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버스를 탄다. 왜? 힘들고 귀찮으니까! 당연히 이런 경험은 이주나에게도 있었고 그것을 이주나는 기회로 만들어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쓰러지지 않는 체력! 그리고 근성!”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기대에 부합할 줄 아는 성격이었다. 일단 지도를 꺼낸다. 평소에도 러닝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는 상비되어 있다. 달리기만 한다면 큰 덩치의 버스보다 더 지름길을 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버스가 지나지 못하는 길을 사람은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똑똑함에 전율이 흐른다. 이미 나는 김현지를 뛰어 넘었다! 체력과 지성을 겸비한 절대 완전체!

하지만 거만해하지 않는다. 토끼와 거북이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간악한 거북이는 토끼를 속여 상상하기 힘든 결과를 이끌어냈다. 자신이 토끼가 될 수는 없었다.

운동화를 점검한다. 가방에 놔두었던 스포츠 드링크를 확인했다. 준비 완벽. 이주나는 달렸다.

 

“하아, 하악, 하아, 하앗, 하…….”

 

호흡이 거칠다. 의식이 흐릿하다. 눈앞이 흐려진다.

이미 러너스 하이를 몇 번이고 경험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슴에 새겨진 의지는 굳건하다.

달리는 소녀 앞에 콘서트 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없이 멀다.

하지만 보인다. 그렇다면 아직은 달릴 수 있다.

 

그곳에 친구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환상이다.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 환상은 계속 달릴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이주나는, 포기하지 않는 소녀는 힘껏 소리 질렀다.

 

“나의, 의지, 노력, 꿈, 그리고 근성은 이대로 무너지지 않는다아아아아!”

 

사람들이 놀라서 뒤돌아본다. 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가 골인하자 친구들의 환상은 당연하다는 듯이 사라졌다. 콘서트홀 근처엔 경쟁자가 없었다.

그녀가, 승리한 것이다.

“하하하, 이 멍청한 것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환성이었다.

 

김현지/

이주나가 수작을 부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속여먹을 생각 만만하다는 건 어린애라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심심했기에 적당히 봐주었다. 무얼 할 생각일까? 단순히 체력 측정에 불과한 놀이라면 자신들은 상대가 될 수 없을 거다. 그리고 이주나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러면 지금부터, 전쟁을 하자!”

전혀 아니었다.

대박 아니었다.

뭐? 가장 빠른 시간? 택시를 타면 40분이 걸린다. 그리고 고작 이천원 짜리 교통 카드로는 택시를 탈 수 없다. 버스를 타라고 강제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딱 보니 자신 있는 체력을 이용할 생각이겠지. 상상만 해도 소름끼치는 바보의 발상이다. 멍청하고 한심하다! 난 한 푼도 안 쓰고 여기 왔다구! 어쩌구 하면서 잘난 척 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인다. 우리 집 동생보다 더 뻔히 보인다.

그렇다면 이주나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는 방법은 단 하나.

상대방이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게 빠른 시간에 도착하는 것이다.

바보같은 계집애.

생각나는대로 주워 섬겼겠지만 사실 이 교통 카드 전쟁엔 필승 전략이 있다.

바로 ‘환승’과 ‘배차간격’이다.

환승이란 1시간 이내라면 버스를 갈아타도 요금을 더 내지 않는 걸 말한다. 그러니까 700원만 내면 1시간 동안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탈 수 있다는 뜻.

버스의 노선을 파악하고 있다면 퍼즐을 맞추듯 최적의 루트를 구해 콘서트홀에 누구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환승 전략에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배차간격이다.

같은 노선을 지나는 버스가 몇 분 마다 오느냐, 이 시간을 알아내는 자가 전쟁의 판도를 지배한다.

하지만 배차 간격 같은 걸 평소에 알고 있을리는 없다. 하지만 이 정보를 얻는 건 간단하다.

김현지는 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버스는 112번. 하지만 지금 도착한 버스는 57번이었다.

 

“아저씨, 112번 버스 배차 간격을 아세요?”

“20분이다. 그리고 곧 올 거야. 한 두 정거장 남았더구나.”

 

이렇게 물어보면 된다! 버스 기사들은 주기적으로 노선이 바뀌니까 높은 확률로 배차간격을 알고 있다!!

 

치익- 하고 다음 버스가 도착했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112번 버스였다. 일반 버스. 교통 카드를 찍자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이제 시작이다. 바보 같은 체육녀를 이 명석한 두뇌로 짓누른다.

김현지는 재빠르게 환승해야할 버스와 노선을 머리 속에서 그리기 시작했다.

버스의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마치 승리를 축복하듯이 잔잔하게 울려퍼졌다. 미소를 참을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지 않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소녀는 말했다.

“하하하, 이 멍청한 것들!”

 

전서인/

전서인은 두 소녀가 성급하게 떠난 뒤 카페에서 가만히 앉아 교통 카드를 바라보았다. 둘에겐 다 생각이 있는 모양이었다. 빠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결단력이 부러웠다. 하지만 자신에겐 딱히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천 원이 충전된 교통 카드로 어떻게 해야 빨리 갈 수 있을까? 일단 커피 값을 치르고 무작정 시내로 나가보았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건 경쟁이다.

이겨야 얻는 것이다.

누구나 하나씩 자신의 소중한 것을 걸었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것이다. 적어도 후회는 남기지 않아야겠지?

잘 하는 건 없다. 뛰어난 부분도 없다. 그렇다면 노력할 뿐이다. 아마 또 지겠지. 하지만 놀이다.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었고, 자신은 그 놀이에 최선을 다했다는 게 중요하다.

 

“그래, 열심히 하자. 나, 화이팅!”

 

전서인은 교통카드를 꾹 쥐었다가 그만 떨어뜨려버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교통카드의 뒷면이 드러났다.

 

‘교통카드는 국민의 대중교통 이용 증대와 에너지 절감을 위해 신설되었습니다. 이 카드는 대중교통 전반에 이용됩니다.’

 

“…….”

그리고 맞은 편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지하철 역을 보았다.

 

 

결말/

 

1시간 후 전서인이 지하철을 타고 콘서트 홀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으로 들린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현지였다.

김현지는 벤치에 힘없이 주저앉아 멘탈이 붕괴되어 있었다.

텅 빈 지갑을 들고 있을 리 없는 지폐를 세고 있는 모습이 잃어버린 자식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모습 같았다.

“실패 일 만원……실패 이 만원……실패 삼 만원……점심 식사 시간엔 배차 간격이 바뀐다는 걸 깜박 했어……역을 잘못 내려 택시를 타……택시 값이 콘서트 티켓 값을 넘어서…….”

흐느적거리는 김현지의 가방을 열어 최신식 전자사전을 꺼냈다.

영어 사전 프로그램을 켜고 영어 단어를 쳤다. 발음 아이콘을 클릭하자 외국인이 무덤덤한 발음으로 말했다.

“Fail.”

“Fail.”

“Fail.”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고는 김현지는 정신을 잃었다. 그 모습이 왠지 통쾌했다. 전자사전을 잘 챙기고 물품 보관함으로 가 보았다. 그 곳에는 땀 투성이 시체가 자빠져있었다. 마지막으로 손을 뻗어 한 보관함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주나였다.

희미한 목소리로 ‘근성근성’하고 울고 있었다. 기력을 다해 쓰러진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걸까? 에이, 무뇌에도 정도가 있지.

패배자들의 묘지에서 전서인은 가슴을 폈다. 가슴 속으로 뿌듯함이 차올라 그대로 표출했다.

“하하하, 이 멍청한 것들! 결국 인생이란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의기양양해하며 보관함에서 콘서트 티켓을 꺼냈다. 싱겁게 포상이 손에 들어왔다. 콘서트 티켓은 크고 아름다웠으며 ‘방청권’이라고 적혀있었다.

의아해하며 두 손에 들린 티켓을 본다.

콘서트긴 콘서트였다.

그런데 개그 콘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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